15위 금수강산 대한민국의 000 영웅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금수강산 대한민국,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금수강산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하면 떠오르는 푸르른 자연환경, 하지만 일제 강점기의 자원 수탈, 산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황폐했던 과거의 대한민국. 허허벌판 대한민국을 푸르게 만드는데 앞장선 인물이 있습니다.
1970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수목원입니다.
천리*수목원 설립자인 한국 귀화 미국인 1호 민병갈 박사입니다. 한국으로 귀화한 첫 번째 미국인입니다.
귀화 미국인 1호이자 최초의 민간 수목원 설립자입니다. 민병갈 박사의 정체는 산림, 식물 전문가가 아니다?!
1945년 미국 해군 장교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고,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복귀했는데 한국의 풍광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국에 뿌리내리기로 결심을 합니다.
1950년대 한국에서 금융인으로 정착했는데,
하지만 처음부터 그를 향한 시선이 호의적이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숱한 오해들!
주변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나무를 심으며 수목원 가꾼 민병갈 박사.
설립 30년 만에 국내 최대 16, 830여 종의 식물을 보유하면서 2000년 국제 수목 학회 인증 아시아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이 됩니다.
먹고 살기 바빴던 전쟁 직후의 대한민국. 국제 학회 활동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시기인데, 과거 일본 학자들은 한국 품종을 일본 품종으로 국제 학회에 등록했던 경우도 많아요.
민병갈 박사가 아니었다면 토종 품종을 빼앗겼을 수도 있어요. 살아생전 민병갈 박사가 자주 했던 말이 있습니다.
외모가 달라도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한 진정한 한국인 민병갈 박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14위 조선 시대 백정들의 아버지!!
1894년 조선,
장티푸스 때문에 생사를 오가는 백정 박 씨, 조선 시대 신분제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천민인 백정, 사람들은 장티푸스를 앓는 백정 박 씨를 외면했죠.
만민이 평등해야 할 생명 하지만 신분 앞에선 무용지물이죠. 특히나 백정에겐 더 각박했던 조선의 현실. 장티푸스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을 경우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치명적인 질병이죠.
상상하기 어려운 왕의 주치의의 파격 행보. 신분별로 진료받을 수 있는 의료 기관조차 달랐던 시대. 고관대작들도 진료받기 힘든 왕의 주치의.
백정이 고종의 주치의에게 치료받을 수 있던 이유는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무어 덕분입니다.
사무엘은 수차례 제자의 집에 방문해 백정 박 씨의 병증을 확인했는데, 백정 박 씨의 병환이 깊어지자 결단을 내린 사무엘.
사무엘이 치료를 부탁한 의사는 고종의 주치의였습니다. 사무엘 덕분에 백정 박 씨는 치료를 받고 회복했습니다.
생명 앞에서 만민이 평등함을 몸소 보여준 진정한 의원이죠. 자국에서도 천대받던 백정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 사무엘 무어는 일명 백정 해방 운도으이 조력자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조선인들을 지킨 사무엘 무어,
조선의 내무대신인 유길준에게 서신을 발송, 백정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조선 정부에 요청을 했고, 조선의 신분 차별 철폐를 위해 목숨 건 사무엘 무어.
수백 년간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조선의 신분제, 신분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건 외국인으로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심지어 같은 조선인조차도 외면했던 백정을 감싼 인류애.
사무엘이 목숨 걸고 백정들을 위해 노력한 결과, 1896년 백정도 평민처럼 갓을 착용합니다.
가장 천대받던 백정부터 끌어안은 선교사 사무엘 무어.
그가 보여준 발자취는 진정한 인간애의 실천 아닐까요?
13위 그들이 000에 안장된 이유?
중국 출신 군인 중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된 사람입니다. 6.25 전쟁 중 한국의 적국이었던 북한과 중국. 혹시 조국을 배반한 중공군이었을까?
장후이린과 웨이시팡은 중국 국민당 소속 군대 국부군 출신으로 국공 내전으로 공산당과 전투를 치르며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었던 두 사람, 국공 내전에서 패배 후, 평양에서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던 장후이린. 평양 탄광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웨이시팡.
6.25 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하자,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계급, 군번은 부여받지 못했는데, 장후이린과 웨이시팡은 중국 특별 수색대에서 적군의 동향 수색, 프로 심문 임무등을 수행하며 유창한 중국어로 적을 교란 시켰다고 해요.
한국을 위해 동족에게 총을 겨눈 장후이린과 웨이시팡, 한국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참전 용사들. 외국인이라며 차별받는 상황에서도 한국을 위해 헌신했죠.
1951년 2월 2일 27세를 일기로 전사했습니다. 녹번리 전투에서 박격포탄 파편을 맞고 중경상을 입은 웨이시팡!!
동족상잔의 비극에도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섰던 장후이린과 웨이시팡.
많은 사람의 용기와 희생으로 얻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장후이린, 웨이시팡 외에도 6.25 전쟁에서 활약한 화교가 많았는데, 참전 용사 화교들은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참전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사후 국립묘지에 안정되지 못한 분들이 대다수죠.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몸 바쳐 투쟁!! 모든 참전 용사와 이름 없는 영웅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출처: 프리한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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