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위부터 11위까지는 위에서 확인해주세욤...^^
일본군 군사기록 제 14연대 진중일지에 실린 항일 의병 관련 내용인데
진중일지는 1907년부터 1909년에 쓰인 일제 보병 제 14연대의 의병탄압기록으로
본국에 보고하려고 만들었을거 아니에요.
일본군의 항일 의병 탄압, 토벌 계획등을 상세히 기록함.
그러나 우리에겐 가슴아픈 항일의병 학살일지죠.
진중일지내에는 의병을 폭도, 도적떼로 지칭하고 의병을 도운 양민을 학살하고
독립군 거주 마을을 통째로 소각함.
기록만 봐도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그날의 악몽.
그러나 일제의 만행이 고스란히 담긴 증거.
의병들의 피와 눈물이 서린 귀한 사료인 진중일지.
2014년 2월 진중일지를 비롯한 일제의 역사 자료를 토대로
이제야 세상에 밝혀진 의병들의 안타까운 죽음...
3.1절 100주년 맞이로 국가보훈처에서 무명 의병들의 추서 방안을 강구중이라고함.
무자비한 일본군에 맞선 이름없는 아무개의병들.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1930년 10월 대만 난타우현 우서에 위치한 우서 공학교에서
대만에 거주하는 군인과 경찰등 일본인들이 운동회를 하고 있었는데
대만 원주민 시디그족의 습격으로 130여명이 사망함.
약 2주전 시디그족의 결혼식에서 시작된 비극.
순찰중이던 일본 경관에게 술을 권유했지만... 거절을 함.
일본 경관은 그들을 짐승처럼 취급하며 족장의 아들까지 구타함.
1895년 청일 전쟁 승리후 대만을 식민 지배한 일본은 원주민들이 수천 년간 지켜온 터전과 자원을 약탈함.
일본의 박해 속에서 족장까지 굴욕을 당하자 시디그족의 분노가 폭발하며 항일봉기한 우서 사건이 발생함.
결국 1200여명의 시디그족은 속수무책으로 당함.
열세에 몰린 족장 모나 루다오의 가슴 아픈 결정.
결국... 전사들과 자결을 선택..!
원주민들은 그동안의 설움이 폭발한거죠.
일본의 핍박과 학살에 쓰러져간 대만 원주민들의 눈물..
무려 약 100년 전부터 마를날 없는 재일 동포들의 눈물...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은 일본, 중국등 타국에 강제징용당했잖아요.
임금은 커녕 타지에서 노예 생활만 계속... 잔혹한 학대와 굶주림까지..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음.
치욕의 타향살이를 한 선조들...은 1945년 마침내 조국해방이 찾아왔지만.
약 200만명의 조선인중 60만여명은 일본에 잔류함.
해방후에도 계속된 재일동포들의 수난.
특히 재일 동포들을 비참하게 만든 지문날인인데
1952년 일본은 외국인등록법을 제정해 지문날인제도로 재일 동포들은 14세가되면 구청에 지문을 등록하게하고 게다가 3년에 한번씩 지문 재등록을 하게함.
엄연히 재일 동포들을 감시, 통제하는 비인간적인 제도인 것.
수십년간 지문날인 폐지를 위해 싸운 재일 동포들
1993년 재일동포의 지문날인 제도가 폐지되었고 여전히 지방 선거권을 비롯한 참정권이 없는 상황이에요.
유엔에서도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라고 권고했지만 묵묵부담으로 일관하는 일본.
침몰한 한 척의 배와 828명의 잊힌 사람들.. 그리고 1834명의 전하지 못한 사연.
1942년 10월 1일 일본군이 벌인 잔혹한 만행.
자본주의 열강 패권전쟁으로 불린 제 2차 세계대전 중 패권이 무너진 영국.
1942년 9월 적대국인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빼앗은 일본은
강제 징용을 목적으로 영국군을 생포함.
1800명의 영국군 포로를 태운 7천톤 급 화물선인 리스본 마루는 그런데 약 한달 뒤인 10월 1일 상하이 부근에서 미국 잠수함 그루퍼의 레이더망에 걸린 리스본 마루.
미군은 일본의 화물선으로 처정해 당시 일본군과 대립 관계였던 미군은 네발의 어뢰를 발사함.
25시간 동안 이어진 잔혹한 살육.
탈출하려는 영국군 포로들에게 총탄세례를 퍼부었다고..ㅠㅠ
심지어 바다에 빠진 영국군 포로들은 보트에 태운뒤 살해함..
그리고 피냄새 맡고 상어들까지 몰려들었다고..
여전히 동중국해 연안에 수장된 리스본 마루의 잔혹한 비극.
3.1 절 100주년 기념 특종에 스페셜 기자로 나온 이유는
일본과 늘 비교되는 나라가 독일이잖아요.
무릎을 끓고 사죄한 빌리브란트 전 서독 총리.
지금도 여전히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는 모습이죠.
그늘 무릎 꿇은건 한사람이지만 일어선건 독일전체였다고.
가장 많은 피해를 본 폴란드에서도 피해의식에 대한것들이 많이 줄었다고하네요.
한번의 이벤트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거에요.
메르켈 총리도 희생자들을 위해, 우리를 위해 미래 세대를 위해.. 절대 잊지 않겠다고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태평양 중서부의 마셜제도.
그중에서도 100여개의 섬이 둥근 띠를 이룬 밀리 환초는 태평양 전쟁중이던 당시
마셜 제도 내 밀리 환초를 미국 침략의 전초 기지로 삼은 일본군
섬주변을 완전히 포위하며 일본을 견제한 미군. 결국 일본은 본국으로부터 식량, 생필품 보급이 차단되었고
그런데 그곳에... 처참히 버려진 이들이 있었어요.
1942년 초 군사 시설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섬 주변의 풀을 뜯어 겨우.. 죽을 쒀먹기도했다고..ㅠㅠ
이때 가장 잔혹했던 일제의 만행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조선인들은 분노가 대폭발함
그리고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조선인들.
일본에게 잡아먹히거나 굶어죽으나 마찬가지라고 맨주먹으로라도 싸워야 한다고.
1945년 3월 18일밤 탈출을 시도한 그때 귓전을 울린 기관총소리
그들은 닥치는대로 조선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함.
항복은 통하지 않은...학살의 끝.
불행중 다행으로 주변 섬에 주둔하던 미군에 대해 종결.
겨우 목숨을 건진 조선인들은 1946년 2월 조국으로 귀환했는데
세상 밖으로 드러난 뼈아픈 살육의 역사.
일제의 만행을 기록한 소중한 자료..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때문에 풀리지 않는 역사의 매듭.
독일은 강제 징용의 과오를 어떻게 반성했을까요?
여러 전범 기업중 대표되는 독일의 전범 기업이 휴고 보*인데
회사 창업자인 효고는 나치당에 가담한 골수당원으로 독일군 군복, 나치 돌격대등 전범 조직의 군복을 생산했고 그리고 폴란드 민간인, 프랑스 전쟁 포로등 강제노역에 동원함.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 종전후 휴고 보* 사업운영권을 박탈함
이제는 제대로된 사과를 해야 할 때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2월 15일
당시 영국식민지였던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은 특히 일본이 경멸한 대상은 싱가포르내 화교들이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 당시에 싱가포르내 화교들을 주축으로 중국에 전쟁 자금을 지원함
그리고 일본의 탄압에 항거하며 항일운동을 함
이를 빌미로 시작된 일본의 잔혹한 살육.
양민 등록을 명분으로 18세에서 50세 중국계 남성 집합을 공고
곧바로 강제검거를 시작한 일본군.
화교들이 끌려간 곳은 창이 포로수용소 앞 해변으로 화교들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총살시작
잔혹함 그자체였다고해요..ㅠㅠ
집단 사격이 끝난뒤 확인사살까지 했다고..ㅠㅠ
심지어 싱가포르 내 다른 화교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살해함.
하지만 일본은 화교 숙정 사건으로 지칭하며 피해 상황을 왜곡시킴.
2016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 태평양 지역위원회에서
싱가포르는 일본 화교 학살 피해자들의 증언집을 기록유산으로 신청했지만 안타깝게도 부결되었고
2013년 기록유산 등재심사도 부결됨.
하루빨리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길..바랍니다....
자신의 과오를 왜곡하는 일본은 대표적인게 교과서죠.
독일은 역사 수업의 약 70%가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내용이라고
일본과 다른 행보를 걷는 독일의 역사 교과서는
일본 교과서는 전쟁 범죄보다 자국민 피해 위주의 내용이 많음.
위안부, 강제징용등 일본이 저지른 수많은 만행은 축소하고 왜곡하고
독일과 전쟁 피해국인 폴란드는 공동으로 역사 교과서를 집필한다고.
잘못된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의 의미이기도 하다고.
일본의 하와이라 불리는 오키나와는 아름다운 휴양지에 숨겨진 슬픈 역사..
한때 일본군이 자국민을 학살한 살육의 현장임
1945년 4월 1일 일본 본토에 돌격하기 위해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은
장장 80여일 간 이어진 일본과 미국의 전투.
한편 양국의 대치 상황에 불안에 떨던 주민들...
한순간 평화의 터전에서 전쟁터가 된 오키나와.
오키나와 주민들이 의지할수 있는건 오직 일본군이잖아요.
그래서 물심양면 일본군에게 식량, 물자 등을 공급했는데
일본군이 알려준 노래인 바다로 가면 이란 뜻의 우미유카바를 제창하기도함.
유미유카바는 천황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라며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노래에요.
과연 일본군은 자국민을 지켰을까요?
하지만 일본군에게 그들은 타국민 그 자체에요.
그래서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이용함.
일본군은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자결하라고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주며 집단 자결을 명령함.
살아남기 위해 겨우 동굴로 피난을 간 주민들은 당시 후퇴한 일본군은 미군에게 은신처를 들킬까봐 젖먹이부터 노인까지 무참히 살해했다고...ㅠ
징용군인 포함해서 무고한 죽임을 당한 이들은.. 무려 12만여명임.
1945년 6월 23일을 위령의 날로 제정하고
지금까지도 오키나와에선 억울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보통 전쟁 피해국에서 주도하는 추모행사
독일 베를린에 있는 홀로 코스트 추모관으로
독일 심장부, 한복판에 놓인 2711개의 검은 비석들은 크기도 제각각이고 마치 관처럼 늘어선 비석은 유대인 희생자를 상징함.
홀로코스트 희생자 600만명의 이름과 역사를 기록하는 공간으로
이 내용을 전부 낭독하려면 6년 7개월 27일이 소요된다고함.
거리 곳곳엔 베를린 길에서 볼수 있는 작은 금속판이 있는데
걸림돌이란 뜻의 슈톨퍼슈타인으로 나치 희생자들이 살던집, 일터 주변에 그들의 이름을 새긴 명판이에요.
베를린 거리 곳곳에 무려 5500여개가 존재함.
베를린 도시 자체가 추모공원 그 자체에요.
알면 알수록 독일과 참 많이 비교되는 일본
게다가 대한 제국 군인들까지 강제 합사함.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다 영혼까지 짓밟힌 선조들..
1937년 겨울... 중국에서 벌어진 일
두 일본군이 벌인 대결
이들이 벌인 대결의 정체는 참수대결...
1937년부터 1938년에 일어난 난징대학살은 희대의 전쟁 범죄이자 끔찍한 학살이에요.
그 참혹한 학살 속에서 살인 경쟁까지 한 일본군
심지어 참수 대결을 중계하듯 보도한 일본언론
사람의 탈을 쓴 두 악마의 만행.
전쟁 포로와 민간인들을 죽이기 위해.... 난징 쯔진산 일대의 마을을 뒤집으며
눈에 보이는 대로 학살하고 또 학살함
일설에 따르면 노인, 아이 심지어는 임산부까지 살해함. 그뒤 일본군 사이에서 게임처럼 번진 참수대결
일명 300명 베기로 이어진 일본군의 만행으로 당시 사망한 피해자 수는 최소 300명으로 추정
2016년 前 일본 방위성 장관인 이나다 도모미의 망언.
중국인들을 두번 울린 참극..
뻔뻔한 일본의 행동에 분노하고 고통받는 중국인들.
독일은 지금까지도 언론에 보도되는 전범 처벌 사례들..
전범 처벌에는 시효과 없는 법.
죄를 지었으면 끝까지 벌을 받아야죠.
미국 유대인 인권단체인 사이먼 비젠탈 센터에세는 전범들의 목록을 확보해 끝까지 추적
독일 역시 전범 추적에 적극 협조한다고하네요.
독일기관인 나치 전범 수사 중앙본부도 91세 나치 전범을 추적한 곳.
일본도 자신들의 손으로 전범을 청산할 날이 오기를...
731 숫자에 새겨진 고통의 역사.
2013년 5월 항공자위대 기지에 방문한 아베 신조 총리는
곧바로 그에게 쏟아진 맹비난.
1933년 화학무기 개발 등의 명분으로 이시이 시로 중장의 주도하에 중국 하얼빈에서 731부대를 창설함.
조선인 중국인등 국적 불문하고 심지어는 임산부, 어린아이까지 모두가 실험대상임
당시 생체실험 대상자를 통나무라는 뜻의 마루타로 지칭하고
각 신체기관에 흑사병의 원인인 페스트균을 침투시킴
그뒤 해부를 통해 세균의 침투 정도를 관찰 게다가 마취제가 실험에 영향을 끼칠까..
마취없이 진행된 생체실험.
상상만 해도 끔찍한 731부대의 잔혹한 만행
증언을 기초로 현재 파악된 피해자 수만 무려 3천여명이에요.
게다가 세균전으로 인한 피해자 수는 수만명이상 추정됨.
일본은 731부대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생체실험에 대해서는 은폐하고 부인으로 일관중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과연 731부대는 어떤 심판을 받았을까?
1946년 미국의 주도로 열린 일본 전범 재판에서 1947년 범의 심판대에 오른 한남자
모두의 예상하길 A급 전범을 저지른 그에게 사형은... 당연지사잖아요.
하지만 무죄로 선고받음. 그가 무죄를 받은 이유는
생체실험으로 축적한 연구자료, 실험 노하우등을 미국입장에서는 결코 놓칠수 없었던 자료이기에..ㅠㅠ
더글러스 맥아더는 731부대의 자료를 받고 이시이 시로의 범죄를 묵인함.
생체실험 자료는 일본 다수 의과대학들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도 제출되었다고하네요.
교토대 의학부는 731부대 관련자들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함.
비통한 역사 속에 가려진 희생자들...
반면 가해자의 만행은 업적으로 남은 잘못된 역사!
그 악행에 눈감은 나라까지... 모두의 반성이 필요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때 독일에서도 자행된 생체실험
다크 투어리즘이라고해서 잔혹한 참상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 등을 방문해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여행이에요.
수용소 방문당시 기분이 묘했다고
죽음을 통해 얻은 의학 지식이 누군가를 살리는 아이러니...
독일 의과대학에서는 역사 강의를 해요. 독일에서는 현대의 의료 지식을 어떻게 얻은 것인지를 교육한다고
지식보단 의식이 우선이에요!
부끄러운 역사를 마주하는 전범국의 진정한 자세...!
1위는 네덜란드 할머니의 용기있는 고백!
2007년 2월 미국 워싱턴 하원 외교 위원회가 연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故 김군자 할머니는
청문회에서 일본의 잔혹한 만행을 폭로하고 뒤이어 증언대에 오른 푸른 눈의 할머니..
네덜란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얀 루프 오헤른
전세계로 뻗친 일본군의 천인공노할 만행.
1942년 일본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침략했는데 당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형 동인도였음
수천명의 네덜란드인이 수용소에 갇히게 됐는데...
1944년 2월 오헤른과 미혼 여성들을 어디론가 끌고간 일본군은
일제 만행에서 절대 빼놓을수 없는 위안부문제.
하루에도 수십번씩 자행된 성적모욕과 쿠타와 집단 성폭행까지..
매일 20명이상의 일본군들을 상대했고 저항하면 살해위협에 가족을 볼모로 협박까지했다고..
평생의 수치였던... 악몽같은 과거..
결국 가족에게도 숨긴채 살아온 오헤른 할머니는 그런데 1992년 한국 위안부 할머니들의 투쟁 모습을 본뒤 큰 용기를 얻게 된 그녀는
1992년 말 유럽 여성 최초로 국제 전쟁 범죄 청문회에 등장
꿈많은 소녀에서 어느덧 아흔이 넘은 오헤른 할머니
그녀의 용기 있는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출처: otvN 프리한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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